새 조국 건설로선을 받들고
●판이한 두 현실
8.15후 북조선에서는 조국에 개선하신 김일성장군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인민자신의 힘으로 새 민주조선을 건설하기 위한 길에 들어섰다.
 이와는 정반대로 남조선에서는 미제국주의자들이 일제를 대신하여 식민지예속화정책을 실시하였다.
 미군은 1945년 9월 8일 남조선에 발을 들여놓은 첫 순간부터 미점령군의 명령에 복종할것과 영어를 공용어로 할것을 선포하고 가혹한 군정을 실시하였다.그리하여 애국적민주세력을 탄압하고 친일친미파,민족반역자들을 저들의 괴뢰로 규합하였다.
 이와 같이 북과 남에 펼쳐진 조국의 판이한 두 현실은 광복된 고향땅에 돌아가 떳떳이 살려는 재일동포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많은 동포들이 일본에서 계속 살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옳바른 정치로선의 확립
이러한 복잡한 정치정세속에서 1946년 2월에 조련 제2차 림시대회가 개최되였다.
 당시 조련은 새 조국건설에 이바지한다고 하였지만 자기의 명확한 정치로선을 가지고있는것은 아니였다.조련안에는 김일성장군님을 모시고 나가려는 애국자들이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회에서는 날카로운 정치투쟁이 벌어졌다.이때 미점령군 정보부는 파괴분자들을 조련림시대회장에 잠입시켜 권총을 란사케 하여 혼란을 조성하였다.그러나 애국적활동가들은 파괴,방해책동을 물리치고 민족의 령도자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 제시하신 새 민주조선건설로선과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를 전면적으로 지지하는 립장을 뚜렷이 하였다.
 바로 이 대회를 통하여 조련은 비로소 자기의 옳바른 정치로선을 확립하게 되였다.
 조련은 김일성장군님께서 광복후 처음으로 보내주신 력사적인 공개서한 《재일 100만 동포들에게》(1946년 12월 13일)에 고무되여 자기 조직을 튼튼히 꾸리며 동포들의 귀국의 보장과 인권의 옹호, 생활안정을 위한 사업,민족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한 사업 등을 활발히 진행하였다.특히 모든것이 부족한 속에서도 자체의 힘으로 《민중신문》을 비롯한 출판물도 발행하며 교원도 양성하고 교과서도 편찬하였다.또한 도처에 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자기 자녀들에게 떳떳한 교육을 시키려는 재일동포들의 간절한 소망을 풀어준것은 조련과 동포들이 이룩한 력사에 남을 귀중한 업적이다.

새 민주조선을 위하여
남조선을 강점한 미제는 1947년에 들어서 조선을 분렬시키려는 기도를 더욱 로골적으로 드러내고 유엔의 간판을 걸고 남조선에서 단독선거를 실시하여 괴뢰정부를 조작하는 길로 나갔다.
 조련과 동포들은 미제의 민족분렬책동을 단호히 배격하고 민족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거족적인 투쟁에 합세하여 한결같이 떨쳐나섰다.
 김일성장군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1948년 4월 남북조선의 56개 정당,사회단체대표 695명이 평양에 모여 련석회의를 가지였다.
 이 회의에서는 미제와 리승만도당이 유엔감시하에 감행하려던 남조선단독선거(《5.10단선》)를 분쇄하고 통일적인 민주주의림시정부를 수립할데 대하여 호소하였다.뒤이어 6월에 진행된 남북조선 정당,사회단체들의 지도자협의회에서는 남북조선 전체 인민의 의사를 대표하는 합법적인 통일적중앙정부를 세우기 위하여 조선의 전 지역에서 8월 25일에 총선거를 실시할것을 결정하였다.
 조련은 련석회의에 자기의 대표를 참가시켰다.그 결정을 관철하기 위하여 4월부터 5월에 걸쳐 《남조선단독선거,리승만정권반대 구국투쟁주간》을 설정하여 대중적인 운동을 벌리는 등 일본 각지에서 대규모적인 집회와 시위를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