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을 이겨내고
조선침략을 준비하던 미제는 일본당국으로 하여금 1949년 9월 8일 조련과 민청(재일조선민주청년동맹)을 강제로 해산케 하였으며 28명의 조련 및 민청 간부들을 공직에서 추방하고 조련의 소유재산과 중요문건들을 몰수케 하였다.(당시 일본 법무청이 집계한 《접수》재산은 건물이 78동, 토지가 2만 6천여평, 예금이 207만 6천여엔, 기타 등이다.이것을 오늘의 평가액으로 추산하면 수천억엔을 넘는다.) 또한 미점령군은 일본정부를 사촉하여 10월 l9일에 《학교페쇄령》을 내리고 우리 학교를 탄압하였다.그 이듬해 8월과 9월에는 《해방신문》과 《건설통신》을 각각 강제적으로 페간시켰다.
 1950년 6월 25일 미제국주의자들은 불의에 공화국북반부에 대한 침략전쟁의 불을 질렀다.
 재일동포들,청년들은 《모든 힘을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라고 하신 수령님의 호소를 높이 받들고 조국수호를 위한 투쟁에 떨쳐나섰다.
 또한 애국조직을 새로 구축하기 위한 투쟁을 벌려 1951년 1월 9일에는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략칭 민전)을 결성하였다.
 그런데 이 준엄한 시기 재일조선인운동의 지도적자리에 있던 일부 사대주의,민족허무주의자들은 동포들을 자주독립국가의 해외공민으로 보는것이 아니라 일본의 《소수민족》으로 간주하였으며 조국을 위하여 투쟁하는것을 《편협한 민족주의편향》이라고 비난하였다.지어 1951년 12월에 열린 민전 제2차대회에서는 공화국을 지지옹호한다는 항목을 강령초안에서 삭제하는 엄중한 오유를 범하였다.
 뿐만아니라 재일조선인운동을 좌경모험주의적인 길로 내몰아 불필요한 희생을 내게 하였다.나아가서 일본인민들로부터의 고립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사정으로 하여 재일조선인운동은 주체를 잃고 존망의 위기에 놓이게 되였다.